예규판례

제목 무역 당사자간 계약자유의 원칙 존중, "가격조작 성립은 엄격히 해석"
등록일 2023-05-09
조세일보
◆…법무법인 광장 조재웅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 제공]
관세법 제270조의2는 '보정신고, 수정신고, 수입신고, 수출신고를 하는 자가 부당하게 재물이나 재산상 이득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할 목적으로 물품의 가격을 조작하여 신청 또는 신고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물품원가와 5천만원 중 높은 금액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2013. 8. 13. 개정 관세법에서 도입된 이른바 '가격조작죄' 조문이다.

동죄가 도입된 배경은 국제교역의 양적 성장 및 질적 복잡화에 따라 무역 주체가 보조금 부정수급, 무역금융(대출) 편취, 법인세 면탈 등 불편부당한 목적으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물품의 값을 사실과 달리 높게 또는 낮게 거짓신고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가격조작 성립 요건을 법리적으로 설시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쟁점물품 수출가격을 고가로 부풀려 신고하고 신고된 가격에 의한 수출대금채권을 금융기관에 매각하거나 담보로 대출받는 등 조작된 수출가격에 의한 수출대금채권을 이용하여 금원을 편취한 것은 부당하게 재물이나 재산상 이득을 취득할 목적으로 물품의 가격을 조작하여 신고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판시한 사안(대법원 2016. 10. 13. 선고 2016도8130 판결), '수출물품 가격을 실제보다 저가로 신고하여 수리받고 저가신고한 수출물품 가격을 바탕으로 임가공품 수입 시 실제보다 저가로 신고하여 관세 등을 포탈하는 방법으로 재산상 이득을 취득'한 경우 가격조작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한 사안(인천지방법원 2018. 4. 5. 선고 2017고단8683 판결) 등이 있는 바,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객관적 행위요소로 수출입물품의 진실한 가격이 따로 있음에도 다른 가격으로 허위신고하고, 주관적 요소로 고의 뿐만 아니라 위법하거나 부당한 목적이 확인되어야 함을 판시하고 있다.

대상판결(인천지방법원 2023. 2. 16. 선고 2021고합924 판결)의 사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첨단기기 연구·개발·제조에 종사하는 피고인 K는 해외거래처 L과 첨단제품 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 제품 사양(specifications) 및 원부자재는 L이 요청하는 기준을 준수하기로 약정하였다.

이후 K는 L이 제품 성능 및 사양 충족에 필요하다며 원부자재 구매처·수량·단가를 알려준 바에 따라 원부자재를 제3국 소재 M으로부터 수입·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완성한 제품을 L에게 수출하였다.

K는 원부자재 수입가격은 M에게 지급한 물품가격을 기준으로, 제품 수출가격은 L로부터 수령한 물품가격을 기준으로, 계약을 이행한 가격 그대로 관할세관장에게 신고하였다.

그러나 관할세관 특별사법경찰은 K가 수입신고한 원부자재 가격이 동일·유사한 품목들보다 높은 가격이고 그에 따라 수출한 제품 가격도 사실과 달리 과대신고된 것으로 파악하고, 원부자재의 생산자와 수출자가 상이하고 거래선이 여럿인 점, 그 밖에 수출입가격 자료의 정확성에 정황상 의문을 제기하며, K가 외국에 소재한 이해관계인에게 부당한 목적으로 금원을 제공하고자 수출입가격을 고가(高價)로 조작하였다고 보아, 관세법상 가격조작 쟁점으로 K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였다.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이 제3자(외국 소재 법인 또는 개인)에게 탈법적인 금원을 제공할 부당한 목적으로 수출입물품의 가격을 고가로 조작하였는지 여부이다.

구 관세법의 허위신고죄만으로 제재하기 어려웠던 수출입거래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공정무역질서를 확립하겠다는 동죄 입법취지를 반영하여, 그동안 세관특사경은 면세 수입품, 수출 등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경우도 가격조작 수사를 지속적으로 강화하여 왔다.

특히 다국적기업간 이전가격 조정, 의료기기 보험수가 고가책정 여부, 중계무역 등 제3국거래 전문기업을 통한 고가 거래 등 기존에 거의 문제되지 않던 분야까지도 동죄로 의율하여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하는 경향이 증가해 오고 있었다.

세관특사경으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은, 대상판결에 관계된 수출입 일체가 거래상대와 계약에 근거하여 이행되었고 제품에 고성능 원부자재가 필요하였다는 소상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K의 수출입가격이 조작된 것이라고 확신 후 거래가격이 과다계상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파생되는 다수의 연관 법조까지 수사범위를 대폭 확장한 다음, K를 수출입가격조작 및 파생쟁점 전부에 대해 기소하였다.

그렇다면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제1심은 K가 L 및 M과 각기 합의한 수출입계약내용대로 물품가격을 지급 및 신고하였고, 수사기관이 고가로 본 원부자재는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하였으며, 다변화되는 국제거래 유형을 감안하건대 생산자가 아닌 수출자가 일종의 중계무역을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제품의 원가·재료·가격 결정에 무역당사자들이 상호 이익을 위해 계약조건을 부가하는 것은 합법적인 경영상 판단인데다가, 수사기관이 지목한 탈법적 해외 금원 제공 역시 관련 자료의 誤認이었거나 증거가 결여된 의혹제기라고 판시하면서, K에게 가격조작의 점 및 파생 쟁점 전부에 대해 무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가격조작 조사 사례가 점증하는 반면에 수출입기업(私人)으로서는 자신의 무역계약이 관세법상 형사처벌되는 가격조작죄인지 식별할 구체적 기준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 봉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상판결은 객관적 가격조작행위와 주관적 이익취득 목적을 세밀하게 검토하여 가격조작 여부를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함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법상(私法上) 계약 자유의 원칙이 가급적 존중되어야(대법원 2020. 6. 11. 선고 2020도2614 판결)하고 국가기관이 사인간 거래에 개입·규제하는 것은 최소화되어야 하며 동죄 성립 시 특별형법상 다수의 중(重)한 쟁점으로 조사·처벌이 확장될 가능성이 실무상 상당한 점을 고려한다면, 무역 관계자들이 겉보기에 이례적이거나 낯선 계약 내용에 합의하였다는 것만을 이유로 가격조작 및 파생 쟁점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여 무죄를 선고한 대상판결의 결론은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인천지방법원 2023. 2. 16. 선고 2021고합924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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