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봉 세무사의 좋은 하루] 그 순간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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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5.02. 오전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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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내가 했던 행동에 후회하기보다는 행하지 못했던 일로 후회하는 경향이 늘어간다.

한 처녀가 세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왕국의 황태자는 권력과 왕관을, 기사는 명예와 보검을, 부유한 상인은 재산과 금괴를 나눠주겠다고 했으나 정작 그녀는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만 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녀가 죽자, 무덤가에 한 송이 꽃이 피었다. 꽃봉오리는 황태자의 왕관을 닮았고, 잎은 기사의 검을, 그리고 뿌리는 상인의 금괴를 닮았다고 한다. 튤립꽃에 얽힌 이야기다. (윤석철의 『삶의 정도』에서)

훗날 튤립꽃 처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고민만 하는, 실속 없이 허울만 좋은 사람을 빗대어 사용하기도 한다. 할지 말지 망설이다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비단 튤립꽃 처녀 만이겠는가. 지난해 어떤 모임에서 뮤지엄 투어 동참을 제안했다. 예전 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뮤지엄 투어 동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튤립꽃 처녀가 한몫한 셈이다.

일본의 어느 시골 섬이었다. 한때는 공장의 생산품이 쌓여가듯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단다. 그것도 한순간, 공장이 멈추자 남은 터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잔해만이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은 주민들은 패잔병처럼 희망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에, 남다른 기업인들이 나타났다. 멈춰 선 공장과 황량한 빈집에 예술인들이 힘을 합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베네세 그룹(사명은 라틴어 'Bene(잘)'와 'Esse(살다)'에서 유래)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경제는 예술의 하인이다."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예술의 섬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도 다다오 일을 만들다』 중에서)

나오시마(지추미술관), 테시마(테시마 미술관), 이누지마(정련미술관)는 그냥 섬이 아니다. 뮤지엄과 바다와 태양, 인간의 생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누군가는 기획적으로 잘 짜인 인공섬을 연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느낌은 아니다. 기획과 개발이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한다면, 태초에 신이 창조한 섬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듯하다.

수많은 여행객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은 과하지 않을 정도로 해맑다. 족쇄 같은 현실의 사슬이 풀리고 나니 이 시간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임을 발견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오브제에 음색을 더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듯하다. 때론 재즈의 선율과 왈츠의 우아함에 취해버린 듯 무아지경이 된다.

청아한 하늘, 상큼한 발걸음, 남녀 간 오가는 대화에 여흥을 돋우는 새소리는 흡사 요들 송이다. 무심한 듯 왔다가는 파도 소리와 간간이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연탄곡(連彈曲)이 따로 없다. 섬은 무대이자 피아노다. 여럿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음이랴. 이유 있는 사랑이어도 괜찮다. 이유 없는 사랑도 마음껏 누릴만하다. 우주(자연)와 연결된 뮤지엄의 특성인가. 뮤지엄이야말로 신이 고안한 세상과 자연의 소통 창구이자 연결 통로다. 어찌 신의 도움 없이도 가능했다고 하겠는가.

지추(地中) 미술관은 땅속에서부터 자란다. 처음이라면 곳곳에서 그라베(Grave, 장엄하고 무게감을 느낄 정도로 느리게)의 감성에 젖어 들지 모른다. 안도 다다오의 우주 속에 모네, 마리아, 터렐이 우릴 맞이한다.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고 보고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월터의 「시간/영원/시간없음」의 공간에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무지개가 떴다. 그 황홀함이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에 한눈팔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지."라는 숀과 월터의 대화를 되뇌게 되었다.

나이토 레이의 테시마(豊島) 미술관은 하나의 작품만을 잉태하였다. 작가도 한 사람이다. 신발을 벗는 의례가 끝나고 탑승하는 순간, 물줄기 생명선과 물방울 오름이 바람에 실려 오가는 환상적 광경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작품명 <Matrix>다. 발걸음을 멈춘다. 예상치 못한 유혹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렌토(Lento, 길게 끌어 느리게)의 호흡으로 심상(心象)을 가다듬고 바닥과 천장과 하늘을 본다. 상상 그 이상이다.

이누시마(犬島)의 이에(집)프로젝트는 우리네 마을 자체다. 일상이 곧 예술작품으로 등장한다. 골목 사이를 거닐다, 목을 길게 빼고 담 너머를 두리번거리는 기린이 된다. 길목은 라르고(Largo, 폭넓고 여유롭게)에서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 명랑하게)에 이르기까지 발걸음 템포를 바꿔놓는 속도 조절 장치이자 방향 지시등이다. 인간의 기교마저 자연스럽다. 삶과 인생에서 예술 아닌 것이 없다.

동행하던 지인의 발걸음 소리가 숨소리처럼 가볍다. "김 대표님, 공기가 참 다네요." 공기가 달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며 양코를 최대한 확장하고서는 숨을 들이켠다. '그래, 이 맛이야. 작품이 뭔지, 예술이 뭔지 좀 모르면 어쩌랴!' "아, 이사님! 정말 다네요. 실컷 먹고 가야겠습니다." 한동안 시간과 허기도 잊은 채 공기를 들이켜고 있었다.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현)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 현) (사)대한바둑협회 임원(이사), 현)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모금분과실행위원회 위원,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총동문회 수석부회장

조세일보/김종봉 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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